GuitarMan 2020. 4. 14. 05:34

이른 새벽에 쉬가 마려워 잠을 깼다.
WC에 다녀와서 누워 계속 자야 하는데 너의 예쁜 얼굴이 떠오르면서 마음을 죄어온다.
작은 화면을 보며 그 얼굴의 주인공을 향하는 내 마음을, 죄어오는 내 마음을 글로 표현하면서 달래야겠다.


구원.
보통 Christians이 많이 사용하는 종교 용어라 할 수 있지.
"구원해주세요."
자신이 어려움에 처했거나 가까운 사람이 곤란한 일을 당했거나 세상이 어지럽거나 할 때 말 그대로 구해달라고 기도를 하며 사용하는 말이지.
너와 나는 불자이니 나름 우리 종교에서 쓰는 표현으로 번역을 하자면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라고 바꿔서 말 할 수 있지.


이런 기도를 하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돌아가신 아버지 말씀대로 사랑이 이루어지려면 너를 애틋하게 원하는 사내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너의 마음이 열려야지 하늘과 땅이 아무리 도와주신들 무슨 소용이 있겠니?


삼라만상 세상의 이치는 더해지면 빠지는 것이 있고 좋아지면 안 좋아지는 곳이 있다
내가 다가가니 너는 물러나며 자연이 정해놓은 '진태'와 '화순'이 사이의 거리가 유지되고 있는지 모른다.


'칠전팔기'라고 했지만 사랑은, 특히 사내가 여인을 사랑함에 이런 도전적 표현은 나는 아니라 여긴다.
물론 바라보는 이들의 인생을 판단하는 시각과 기준이 다르기에 '도전'이라는 표현을 좋아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삼세 번'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지.
자꾸 문을 두드리고 세 번 정도는 연속으로 다가가라고 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방법으로 나는 '도전'보다 '기다림'을 선호하는 편이다.
'화순'이의 마음의 문은 '화순'이가 열어야지 '진태'가 강제로 열 수 있는 문이 아니니까 말이다.
또 강제로 열고 들어가 돌아서있는 너를 돌려세운들…


'팔자가 세다.'라는 말이 있지?
'사랑'에 대해서 내 삶이 그런가봐.
너를 좋아하는 친구로 느껴질 때는 받아줬던 너도 내가 사랑한다며 다가가니 돌아서 버렸잖아.
사실 너를 본 후부터 너를 향한 내 마음과 감정은 항상 똑같은데 속마음을 솔직히 전하면서부터 이 아픔과 고통을 안게 됐잖아.


"사랑해."
라는 말이 그렇게 부담되니?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게 그렇게 싫어?
두 아들을 품고 있는 너의 그 마음에 정말 나를 받아줄 공간이 없는 거야?
화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