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장 혁'이 주연인 영화 'The Killer : 죽어도 되는 아이'의 마무리 즈음에 영화의 제목과 정반대되는 말을 한다.
"이 세상에 죽어도 되는 애들은 없어."
이 장면에서, 오래 전 무협영화 '鐵馬騮'에서 나왔던 '흠차대인'이라는 惡人의 대사가 떠오른다.
"나는 죽이고나서 때린다."
라고 하는 말같잖은...
어쨌든 앞에 언급한 '장 혁'의 대사도 죽어도 싼 년의 대가리를 총알로 관통시키고 한 말이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生命은 소중한 거야.', '어떤 경우라도 殺人은 안 돼.' 등×2 목숨에 대해서 귀하게 여기라고 배우고 들어왔다.
하지만 실제 지나온 歷史는 물론이고 돌아가는 이 社會는 목숨, 그것도 '사람의 목숨'을 별로 중하게 여기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아마도 祖上 때 살아있는 사람을 산 채로 매장을 한다던가 작게는 마을을 크게는 나라를 초토화 시키며 몰살해버리는 그 습성의 유전자가 가늘게 후손인 우리에게까지 이어져 온 것이 아닌가 싶다.
劇을 보면 칼 부딪는 소리, 총이 발사되는 소리 등 무기 그러니까 '살해도구'에 의한 소리가 나고 화면에 시뻘건 액체🩸가 흥건한 장면이 보여지는데 이런 류의 劇들이 사람들에게 끔찍하다거나 무서운 느낌을 주지 못 한다는 거다.
아니지.
보는 이들이 그런 기분을 못 느낀다는 것이 맞는 얘기다.
어떤 학자의 의견은 사람들이 情緖가 메말라감에 정상적으로 느껴야 할 무서운 느낌, 오싹한 느낌을 점×2 덜 느낀다고 한다.
그러나 筆者는 오히려 반대로 문명이 발달하며 古代시대의 사람들처럼 침략 및 전쟁을 하지 않고 점차 덜 하며, 해치고 피를 보는 일이 줄어들면서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DNA가 잠시 퇴화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그 DNA가 劇의 '연출된 장면'을 통해서 視覺的 감각에 의해 다시 시나브로 깨어나고 있는 것이다.
더해서 옛날처럼 난리급은 아니라도 곳×2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terror에 의해 퇴화했던 그 DNA가 살아난 것이 아닐까 싶다.
잔인한 장면에 무감해지고 어떤 살인사건의 기사를 접하면 그 방법이 점차 잔인해지고, 요즘은 좀 뜸하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연쇄살인사건'을 보면 범인들은 하나같이 무표정이거나 희미하게 옅은 미소로
"죽어야 할 것들 죽였는데 왜들 난리야?"
하는 태도다.
'죽어야 할 것들...'이라고 하면서 정작 죽어야 하는 것들을 죽이진 않고 상관없는 아이들, 애꿎은 여자, 힘없는 노인 등 해치기 쉬운 대상들만 죽인다.
마치 'Jurassic World'에 나왔던 'Indominu Saurus'가 했던 그 짓거리처럼...
오래 전부터 '소중한 것'이라고 배웠으면 그냥 소중하게 대하면 되는데 '人間'이라고 불리우는 우리는 왜 그러는지 그렇게 살고 싶지가 않은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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